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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보리암 신라의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수도 도량 + 보리암 가는길, 요금, 주차장

데일리여행 2024. 9. 1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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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 금산 한가운데 자리 잡은 보리암은 신라 신문왕 3년(683년)에 원효대사께서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관음봉을 기대고 있는 이 사찰은, 남해 바다의 장엄한 경치와 어우러져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곳은 단순한 사찰이 아닌, 바위와 바다, 그리고 하늘이 만들어낸 자연 법당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와 수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보리암의 기원

보리암의 역사는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원효대사께서는 금산을 ‘보광산(普光山)’이라 부르고, 동쪽 기슭에 절을 세워 ‘보광사(普光寺)’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한 후 왕위에 올랐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 사건 이후, 보리암은 조선 왕조의 원당이자 호국 기원의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보리암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사찰이지만, 무엇보다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진 풍광이 사람들의 마음을 끕니다. 특히, 절을 둘러싼 바위들은 마치 신령스러운 존재들이 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용을 타고 경배하는 남순동자 바위, 관음조가 읊조리는 듯한 바위들은 이곳을 더욱 신비롭게 만듭니다.

 

보리암의 역사적인 중요성

보리암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도 매우 큽니다. 고대 가락국의 김수로왕도 이곳에서 기도하고 대업을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김수로왕의 칠왕자도 외숙인 장유국사와 함께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이후 지리산 반야봉에서 견성성불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특히, 보리암은 불교 남방 전래설의 증거로서, 북방 전래설보다 292년 앞선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보리암이 불교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출가자와 수도자들이 이곳을 찾아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보리암 위치 및 가는 길

위치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보리암로 665(상주리 2065)

 

가는 길

 

 

 

 

 

 

 

 

보리암 방문 정보

 

 

 

보리암은 남해 금산에 위치하고 있어, 등산과 함께 사찰을 방문하는 코스로 유명합니다. 절을 오르는 길은 약간 험난하지만, 정상에서 만나는 풍경은 그 모든 수고를 보상해줄 만큼 아름답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기도와 명상을 할 수 있는 이곳은 마음의 정화를 원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특히, 새벽에 방문하면 해가 떠오르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일출 명소로도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남해의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보리암, 이곳에서 당신도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람료 및 주차장 정보

관람료

 

 

 

 

 

 

주차장 정보

 

평일: 4000원 주말: 5000원

 

제1주차장:  거리상 셔틀버스 이용 추천 어른왕복: 3400원 학생: 2800원

제2주차장:  매표소 근처 주차공간 협소 오전 일찍 방문 추천   

 

보리암 전각 및 문화재

보리암전 3층 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

시대 : 고려시대
규모 : 고 1.8m, 폭 1.2m

보리암전 3층석탑은 가야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돌아올때 풍파를 만나 건너 오지를 못 하는 중 파사석을 싣고 무사히 건너왔다고 한다. 석탑은 원래 김해시 구지봉 산아래에 있는 호계사에 봉안되어 있던것을 그후 원효대사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74호로 지정되었다.

 

해수관세음보살상(海水觀世音菩薩像)

보리암에서 가장 기(氣)가 강한 곳으로 알려진 해수관세음보살상은 1991년 한 기업가의 원력으로 세워졌다. 당시 지형적 영향으로 육로로 운반 할 수 없었던 해수관세음보살상은 헬기를 이용하여 탑대에 안치했다.
좌대는 연꽃문양으로 하좌대와 상좌대로 이루어져 서로 마주 보게 포개져 있다. 왼손에는 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가슴에 두었다. 의습은 양어깨를 감싸고 각각의 팔을 휘감으며 아래로 흘러 내렸으며, 흘러내린 옷깃은 그 끝이 살짝 들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이다.한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고 가는 이 해수관세음보살상은 보리암의 제1명소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 보광전(菩提庵 普光殿)

시대 : 광복이후
규모 : 목조, 정면 5칸, 측면 3칸
부속물 : 신중단, 지장단, 영단

보리암의 주법당으로 대웅전 역할을 하고 있는 보광전은 신라 신문왕 3년(683년) 초창이래 여러번의 중건 중수를 거쳤으며 현 보광전은 1968年에 중건하고, 2000年에 중수하였다. 보광전에 모신 주불은 서천축 아유타국 허공주가 모시고 왔다는 관세음보살(좌보처 남순동자, 우보처 해상용왕) 삼존상(三尊像)이며 목조관음보살좌상불감은 2015년 1월 15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 575호로 지정되었다.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의 현판은 '산령각'이라 되어 있으며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별지화로 매화가 그려져 있고, 좌우측에 신선도가 그려져 있다. 산신각의 내부에는 호랑이 위에 앉은 산신상이 모셔져 있다.

 

간성각(看星閣)

지금 종무소로 이용하고 있는 간성각은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별을 보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다른곳에서 보기 힘든 노인성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이 별은 12월 하순과 1월 사이에 볼 수 있다.

 

 

범종각(梵鐘閣)

종각은 1977년 사중에서 건립하고 범종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신동관 선생이 시주하였는데 크기나 무게 때문에 헬기로 공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일체 지옥중생과 만경창파 수륙고혼의 이고득락과 해탈을 염원하고 있다.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각지붕으로 보리암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좌.우에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으며, 1996년부터 원불을 조성하여 2000년에 완성하였다.
많은 원불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여 만불전(萬佛殿)이라고도 한다.

 

보리암을 창건한 원효대사

보리암의 창건주인 원효대사는 신라 통일의 격변기였던 7세기에 살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승려가 아니라,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불교뿐만 아니라 유가서와 도가서에도 해박한 지식을 쌓은 학자였습니다. 원효대사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년)에 경북 경산군 자인면에서 태어났으며, 15세에 출가하여 불교의 깊은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650년,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습니다. 이후 661년에 다시 시도했으나, 적산의 무덤 속에서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떻게 따로 구하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고 돌아와 저술과 대중 교화에 힘썼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당시 대중들뿐만 아니라 왕실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남긴 100여 부의 저서는 오늘날까지도 불교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686년 신혈사에서 입적하였고, 그의 정신은 보리암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리암을 방문하면, 원효대사의 깨달음과 철학이 스며든 이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리암의 현대적 변화

보리암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보수와 중창을 거치며 그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 왔습니다. 특히, 1966년부터 1985년까지 주지로 부임한 양소황 스님은 보광전과 산신각을 중창하고, 간성각, 범종각, 보리암 요사, 의상대 등을 새로 세웠습니다. 이후 명도각 스님, 동욱 스님, 묘유 스님, 그리고 현재의 능원 스님까지, 여러 스님들이 보리암을 관리하고 발전시키며 현대적인 불교 수도 도량으로 가꾸어 나갔습니다.

보리암에 방문하면 극락전, 해수관음상, 그리고 신설된 돌계단과 돌담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설들은 모두 많은 신도들이 기도와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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